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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으로 잇는 맛있는 나눔

글 박찬일 셰프

박찬일 셰프

최고와 최선이 만난 곳, 행복나눔재단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SK 뉴스쿨? 그게 뭐지? 대기업이 하는 자선사업? 솔직히 말해서, 한두 해 하다가 그만둘 수도 있는 일 같았다. 왜 아닐까. 가르치는 일은 백년대계라고 그만큼 어렵고 지치는 일이니까. 그런데 대기업의 재단에서 이 일을 시작한다니. 하지만 막상 만난 ‘매니저’라는 직원들과 미팅하면서 나는 조금 놀랐다. 뭔가 하겠구나, 이 친구들은 다르구나, 그런 막연한 감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빡빡하다고 할 정도로 지독한 학사일정을 끌고가는 것을 보면서 감동했다. 그리고 그 일정을 따라가는 아이들이 대견했다. 사실, 그 전에 이런 강의 경험이 꽤 있었다. 그러나 일회성에 그쳤다. 아이들을 어떻게 사회에 진출시키고, ‘물건을 만들어서’ 내보낼 것인지 고민은 없었다. 그런데 그걸 한다고 했다. 그게 바로 SK 뉴스쿨이다.

이 학교에 오면 크게 놀랄 일이 있다. 우선은 시설이다. 내가 “한국에서 이만한 수업시설을 갖춘 요리학교는 없다”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최고의 시설과 시스템을 제공하는 대신 아이들은 최선을 요구받는다. ‘아이들이니까’, ‘아직 처음이니까’ 이런 기운보다는 ‘SK 뉴스쿨은 다르다’, ‘짧은 시간에 완벽하게 배워(가르쳐)야 한다’는 어떤 강박까지 느꼈다. 아이들은 눈빛이 살아 있었다. 오히려 내 요리 사사가 아이들에게 바른 방법이 될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어쩌면, SK 뉴스쿨은 나를 가르쳤다. ‘이봐, 잘해보라구, 아이들이 보고 있으니’ 이런 것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생각난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녀석들이 꽤 많다. 그러나 밝았다. 주눅들지 않고 활기찼다. 무엇이 이들에게서 열등감을 빼앗아(?) 갔지? 그것이 SK 뉴스쿨의 힘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기수들 중 다수는 학교로 돌아가거나 현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SK 뉴스쿨에서 가르치다 보면 레스토랑 ‘오늘’에서 일하는 녀석들도 보게 된다. 그 바쁘고 힘든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멋진 친구들!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도마질 한 번, 칼질 한 번이 인생을 만든다고, 우주는 먼지가 움직이는데서 시작한 것이라고.

고된 땀이 빚어낸 결실

나는 본디 요리사가 아니었다. 잡지기자로 7~8년을 일했다. 꽤 좋은 기자라고 평판을 들었지만 적성에 잘 맞았던 것 같지는 않다. 우선 사람을 만나는 것이 힘들었다. 기자란 기사를 쓰는 일보다 사람을 다루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이 불편하니,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럼 무얼하지? 요즘은 오픈주방이 흔하고 요리사가 사회활동도 많이 하지만 당시에는 ‘베일 속의 사람들’이었다. 주방은 폐쇄되어 있어서 누가 요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바로 저거야. 나는 주방에서 혼자 요리하는 일이 맞을 것이라고 믿었다. 워낙 국수를 좋아했고, 여동생이 이탈리아어를 전공하고 있어서 관련 정보가 있는 데다 이탈리아 영화의 매력에 푹 빠졌던 터라 이탈리아 유학은 자연스레 결정됐다. 그렇다고 몇 년씩 배우는 것을 고려한 것도 아니었다. 돈도 없었다. 당시 한국에서 인기 있던 카르보나라, 해물 스파게티, 크림 스파게티 3가지만 배워오려 떠난 길이었다. 그런데 요리학교에서 이런 것들은 전혀 가르쳐주지 않는 게 아닌가. 불안했다. 선생님께 물었다. 왜죠? 그가 웃었다. 그의 얘기는 대충 이랬다. “이봐, 미분적분을 배우면 인수분해는 저절로 되는 것 아닌가?” 나는 깨달았다. 그렇구나. 자연스레 이탈리아 요리의 저 깊은 수준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통도 뒤따랐다. 언어 문제였다. 제대로 배우지 않은 말이 소통을 방해했다. 게다가 몸도 아팠다. 이국의 노동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배운다는 게 얼마나 힘들까. 한국에 와 있는 산업연수생을 생각하면 비슷할 것 같다. 당시 아내와 어린 아기를 두고 떠난 길이라 향수병도 심했다. 이유를 모르는 통증이 엄습했고 몸무게가 십몇 킬로그램이 빠졌다. 피골상접이 그것이었다. 우울증까지 생겼다. 이국의 고통이었다.

한국에 들어와 막상 요리를 하려니 나이가 많아 퇴짜였다. 당시 나이 서른일곱! 그때는 이직이나 전업이 아주 드문 세상이었다. 식당에서 꺼려했다. 겨우 일을 구했다. 월급 백만 원. 그것으로 살림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됐지만, 배운다는 신념으로 버텼다. 그렇게 요리사 이력을 만들어갔다. 몇 년 후, 청담동에 한 식당을 맡게 됐다. 당시 양식당이라고 하면, 으레 스테이크가 주종목이고 뻔한 스파게티를 팔았다. 수입한 서양재료로 요리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최소한의 수입재료 외에는 한국의 재료를 썼다. 전국 팔도에서 나는 우리 재료를 보러 다니고, 시장에서 파는 싱싱한 재료를 썼다. 냉동이나 수입 대신 우리 것으로 요리했다. 물론 이탈리아 요리였다. 새벽마다 수산시장에 갔다. 당시 일식당 사장 외에 새벽장을 보는 요리사는 거의 없어서 상인들은 다들 내가 일식당 사장인 줄 알았다. 차가 없어서 늘 아이스박스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노량진시장에서는 아직도 나는 몰라도 아이스박스 들고 안경 쓴 ‘사장님’은 다 안다. 그렇게 사람들과 친해지고, 가장 물 좋은 재료를 샀다. 그 요리가 결실을 맺었다. 지금은 한국의 많은 후배 요리사들이 원산지를 밝히고, 우리 재료로 서양 요리를 한다. 내 노력과 시도가 그 밑거름이 되었다.

장인을 키우는 밑거름

나는 다시 SK 뉴스쿨에서 다른 밑거름을 만든다. 아이들을 기른다. 완벽한 지원과 시설, 담당 매니저들의 열정,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어떤 결단들. 돈을 벌어 다시 가장 낮은 곳으로 흘려보내는 의지, 그것을 우리는 자본의 선순환이라고 이를 것이다. 이는 놀라운 일이다. 기업이 사회에서 번 돈을 이렇게 쓰다니. 아이들은 그런 최고의 환경에서 배운다.
그들이 언제든 요리사로 월급 받고 일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내 목표다. 그래서 늘 칼질을 시킨다. 기술은 나중 문제이고, 기본적인 칼질을 해야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다. 나는 그 기초를 강조한다. 레시피도 좋고, 요리 기술도 좋다. 그러나 그 기본은 바로 칼을 우리 손처럼 쓰는 일이다. “칼이 네 손이 되었니?” 나는 늘 묻는다. 그림 그리는 자는 붓으로, 글 쓰는 이는 펜으로, 요리하는 이는 칼로! 그 보편적인 기본을 아이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리하여 이름난 요리사는 못될지 몰라도, 장인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 소박한 주문이고, 아이들도 알아듣는 눈치다. 또랑또랑한 눈의 아이들, 그들을 다시 보고 싶다. 얘들아!

박찬일 셰프
이력
  • 로칸다 몽로 셰프
  • SK 뉴스쿨 강사
  • 일간지 음식칼럼니스트
  •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 수료
  • 월간지 취재기자
저서
  •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백년식당
  • 보통날의 와인
  •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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