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June Vol. 09
Essay 일상의 작은 것들이 모여 기적을 만든다
희망의 빛을 비추는 ‘나눔 기획자’
배우 겸 작가 이광기 편
누구나 한 번쯤 시들어가고 있는 꽃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이렇게 힘든데 과연 내게 봄날은 올까? 우리 가정에 다시 예쁜 꽃이 필 수 있을까? 난 시들어가는 꽃이 아닐까’ 절망하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광경을 보게 됐습니다. 시들어버린 꽃 옆에 작은 씨앗들이 떨어져 있는 것을요. 생사의 막간에서 애잔하게 스러지던 꽃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러짐은 소멸이 아니라, 생명의 뿌리라는 것을 깨닫던 순간이었습니다.

막과 막 사이, 경계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씨앗

지난 해 첫 개인 사진전 ‘막간’에 출품한 작품들은 이런 묵상에서 시작했습니다. 생화(生花)와 조화(造花)를 한 화병에 담았을 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극렬한 대비 속에서 삶과 죽음, 진실과 거짓을 포착하게 하고, 그 너머에 또다시 새로운 삶이 시작되리란 걸 예감할 수 있게 한 것이죠. 이처럼 끝과 시작을 연결하는 순환의 고리가 바로 막간입니다. 무대의 막과 막 사이에서 울음을 터뜨리곤 했던 어린 배우 시절, 그리고 아들 석규를 잃은 슬픔으로 깊이 침잠해있던 시절 머물던 공간이 바로 막간이며, 이는 섭리에 순응하는 준비의 공간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진’이라는 매체에 내가 포착한 순간을 담고, 이 감동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전하는 일은 아프리카의 아이티에서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그늘진 얼굴이 환하게 바뀌는 모습, 희망으로 반짝이는 눈망울을 담았던 사진을 나중에 보면서 다시 그 감동이 살아나는 걸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진 한 장으로도 큰 울림을 줄 수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의 꿈 공장, 아이티에 학교를 지은 이유

아이티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건 이곳에 진도 7.0의 강진이 휩쓸고 가면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월드비전과 함께 달려간 그곳에서 석규와 같은 나이의 아이, 세손을 만났습니다. 지진으로 부모를 잃고 엉엉 우는 세손을 품에 안았을 땐 내 아이를 다시 안은 것 같았습니다. ‘꿈속에서나마 석규의 체온을 느껴보고 싶다’는 마음이 하늘에 닿은 것 같았습니다.

당시 지진으로 아이티의 많은 학교가 무너졌습니다. 학교는 아이들의 꿈을 만들어내는 공장입니다.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아이들은 밭에서 일을 하게 될 테지요. 언젠가, 자신의 꿈을 도화지에 그려보도록 했을 때 아이티 아이들은 농사짓는 장면이나 오토바이 등을 그렸습니다. 동네에서 볼 수 있는 것들뿐이었어요. 꿈이 동네 안에 갇혀 있는 겁니다. 바깥세상을 알려주고 꿈의 크기를 키우는 것은 공부, 그리고 학교입니다.

학교를 지어주고 싶은 마음에 한국으로 돌아와 아이티자선 미술 경매를 열었는데 다행히 반응이 좋았습니다. 세 번의 행사만으로 학교를 지었고, 이후 또 한 동을 지었습니다. 500~600여 명 아이들이 다니는 이 학교의 이름은 케빈, 먼저 천국으로 간 석규의 영어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젠 아이티가 아닌 다른 지역에도 학교 지어주기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빈곤과 기아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공부라는 걸 지역민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먼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아이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매일매일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예술을 통한 나눔’의 실천, 자선경매와 피스 핀

아이티에 학교를 지어준 힘은 ‘예술을 통한 나눔’이었습니다. 자선경매를 포함해 10여 년간 미술 전시를 진행했는데, 작가에게는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게 알리면서도 기부까지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습니다. 아이티 아이들뿐 아니라 작가들까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죠. 이런 전시를 하면서 떠올린 키워드는 ‘방향’입니다. 후배나 후세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재능을 통한 나눔, 공유를 통한 나눔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자선 미술전시와 관련해서 가지고 있는 앞으로의 계획은 공익재단을 설립한 뒤 ‘라이브 자선 경매방송’을 제작해 대중과 신진 작가들을 연결해주는 것입니다.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에서 헨리와 함께 경매 방송을 했던 것처럼요. 스튜디오 ‘끼’를 설립한 것도 이런 예술 나눔을 위한 플랫폼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재능은 있지만 이를 선보일 무대가 없는 작가들을 위한 전시, 선배가 후배를 끌어주는 2인 전시 등으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대화를 나누거나 회의를 하고 강의를 듣는 그런 공간이 되도록 할 겁니다. 또한, 최근에는 예술가들과 함께 희망의 시작점을 뜻하는 ‘피스 핀(Peace Pin)’을 설치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작은 것들이 모여 기적을 만든다

나눔은 작은 일상일 뿐입니다. 내가 가진 공간과 재능을 나누는 일, 행사나 강연 등을 통해 후원과 기부에 동참시키는 일과 같이 소소한 것들뿐인데, 이런 일상의 작은 것들이 모여 기적을 만들곤 합니다. 그래서 제게 나눔은 ‘경제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큰 선물’입니다.

지속적으로 나눔을 실천하다 보면 또 다른 삶의 카테고리가 더 생깁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카테고리는 인생의 2막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배우에서 예술작가로, 예술 기획자 및 관련 행사 진행자로, 그리고 나눔 기획자로 활동하며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이 일이 좋습니다. 지금 저는 매우 행복합니다.